은퇴 후 첫봄을 지내면서 L씨의 눈에 새삼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 설치된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어르신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L씨는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단다. ‘내가 그 어르신들의 나이가 됐을 때, 나의 옆에 있을 사람은 누구일까?’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에게 ‘은퇴 후 관계’에 관해 물었다.
80~90세 어르신의 일상이 무료해 보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할 일이 없어서? 건강하지 않아서?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는 “관계 맺기를 잘하면 부유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후반부 삶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퇴 후인 지금은 관계를 돌볼 절호의 기회이다.
Q. 은퇴 후, ‘관계’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나?
‘관계의 동심원’을 그려보자. 유진 오켈리(Eugens O’Kelly)라는 사람이 쓴 책 ‘인생이 내게 준 선물’에 나오는 것인데, 동심원을 그린 후 안쪽부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러면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시간을 지혜롭게 쓸 수도 있다. 대부분은 가족이 가장 중심에 놓인다. 은퇴 후에는 삶의 중심도 직장·사회에서 가족·이웃 중심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려면 기존 관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다.
80대의 한 어르신은 일주일에 2일 정도 일하고, 다른 날은 그동안 쌓아뒀던 책과 자료를 읽고 정리하고 버리는 시간을 가진다. 그동안은 바빠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 은퇴 후에는 그렇게 정리할 여유가 생긴다. 즉 은퇴 후 지금까지 바빠서 미뤘던 그 관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사실 나이 듦의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는 마음이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그동안 원수로 지냈던 사람과 풀고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일 수도 있다.
Q. 풍요로운 관계를 맺으려면?
나이 들면 체면을 앞세우며 관계에 전혀 공을 들이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나를 배려하고 응대해 주는 사람은 없다. 가족이라도. 먼저 다가가야 한다. 저 멀리 뚝 떨어져 앉아 어른 대접 받기보다는 먼저 다가가야 한다. 사람 마음 공짜로 얻지 못한다. 물론 이렇게 잘 맺은 관계를 잘 지켜나가려면 소통도 잘해야 한다.[Tip 참고]
장년층은 그동안 살아온 경험 덕분에 말 안 해도 알고 표정만 봐도 상대의 고민을 알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무관심, 무신경, 무표정을 버리고, 상대방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도움이 될 이야기로 관심의 문을 연다면 인간관계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화 ‘인턴’에서 ‘벤’이 인기 만점 동료가 된 비결은?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고 △나이 유세를 떨지 않으며 △섣불리 충고하는 일도 없다. 또 △얼굴은 항상 온화하고 태도며 행동도 부드럽다. 그러니 누가 벤을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현실에서 ‘벤’이 되기 쉬울까? 하지만 노력해야 한다.
12소통을 위한 노력 6첫째, 휴대전화를 조심해야 한다. 휴대전화를 너무 애지중지하면 대화가 안 된다
둘째, 말 끊고 끼어들기는 그만해야 한다
셋째, 이심전심도 좋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말로 해야 안다
넷째, 비교하거나 자존심 건드리는 건 금물이다.
다섯째, 긍정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게 아니고 내가 봤더니”가 아니라 “그래, 그게 맞아”라고 긍정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여섯째, 모든 소통에는 웃음이 있다. 활짝 웃을때 마음이 열리고 소통할 수 있다
[출처: 나이듦수업, 유경 등, 서해문집]
Q. ‘나’와의 관계부터 정립해야 한다?
먼저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감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많은 것이 인생인데, 대부분은 못한 것만 생각한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와 부끄러움이 원망으로도 이어진다. 이래서는 나에게 평화가 없다. 나와 화해하지 못하면 다른 관계도 쉽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임’이다. 후회가 있는 인생도, 깊게 팬 주름과 느려진 행동도, ‘꼰대’라 불리는 불편함도, 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이것을 자연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때 문제가 생긴다. 그 깊은 겨울을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누가 뭐래도.
Q. 부부 관계를 위한 처방전은?
부부가 인생에 좋은 친구가 될 것이냐, 그냥 이대로 평생 원수로 끝낼 것이냐는 지금 하기 달렸다. 남편 은퇴 시기는 아내의 갱년기, 자녀의 진수(進水) 시기와 대부분 겹친다. 부부가 다시 관심이라는 씨앗으로 사랑에 불을 지피려고 노력해야 하는 시기란 의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 눈을 바라보고 하는 대화이다. 또한 은퇴 후 젖은 낙엽처럼 부부가 붙어있기보다는 ‘따로 또 같이’가 필요하다고 본다. 함께 시간을 보내되, 서로 취향을 존중하며 일정 부분은 각자의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한다.
그런데 남편은 은퇴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집안일로 바쁘다. 그 힘을 덜어줄 사람이 바로 남편이다. 집안일은 함께 하는 것이다. 남편, 앞치마부터 매자.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도 좋은 출발점이다.
Q. 자녀와 잘 지내려면?
어른 대 어른으로 대화할 것을 추천한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현재 서로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예를 들어 부모는 현재 가진 재산과 연금으로 부모가 자녀의 도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다든지, 하지만 그것이 자녀의 결혼자금이나 사업자금을 도와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 등에 대해 말해 보자. 진솔한 대화가 없으면 오해가 쌓일 수도 있다. 다만 대화할 때는 “큰 애는 저번에 용돈 얼마 가지고 왔더라”라는 식의 편애와 비교는 금물이다.
사실 요즘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손주 육아’도 빼놓을 수 없다.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체력, 시간 등의 육아 여건이 충분히 된다면, 손주 육아가 자녀와의 관계에 접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그동안 자녀들 들여다볼 새 없이 직장 다니고 일하느라 자녀들과 멀어진 것 같아 서운한 할아버지에게 말이다. 물론 무조건은 아니다. 조부모가 육아를 할 충분한 여건이 된다는 전제가 반드시 꼭 필요하다. 또 육아 방법에 대해, 보상에 대해, 시간과 기한에 대해 자녀들과 깊은 합의가 바탕이 돼야 한다. 나는 ‘돌봄 계약서’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한 지인은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돌보고 주말에는 너희가 반드시 데려가라. 또 1년에 한 번 반드시 참석해야 할 세미나가 있으니, 그때는 반드시 시간을 만들어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또 ‘아이돌봄서비스’ 등의 사회제도를 적절히 활용해 조부모의 삶도 누려야 한다. 특히 할아버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Q. 노노스케어, 쉽지 않다?
내 생각엔 다른 형제와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고 본다. 혼자서 부모를 섬기다 보면 어찌 됐든 섭섭함이 생기고 지칠 수도 있다. 조금 다른 말인데, 지금 길거리에서 만난 그 어르신에게 잘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비록 내 부모는 아니지만, 당신이 그 어르신을 도우면 다른 어떤 젊은이가 당신의 부모를 돕지 않겠는가?
[money 머니?!] 아이돌봄서비스(Idolbom.go.kr)만 3개월~12세 이하 아동의 가정에 아이돌보미가 찾아가 1:1로 아동을 돌보는 서비스이다. 야간·공휴일 상관없이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만큼 이용할 수 있다. 만 12세 이하 아동을 필요한 시간만큼 돌보는 ‘시간제(일반형·종합형)돌봄서비스’와 만 24개월 이하 영아를 종일 돌보는 ‘영아종일제(영아종일제·보육교사형) 돌봄서비스’가 있고, 기관파견 돌봄서비스, 질병 감염 아동 특별지원 돌봄서비스 등도 있다.
이용요금은 시간당 일반형 6500원·종합형 8450원, 영아종일제 6500원, 보육교사형 7800원 등이다. 휴일·공휴일에는 시간당 3250원이 추가된다. 소득에 따라 정부지원금도 받을 수 있다.
새로운 사회관계… 더 풍성한 삶으로 터닝포인트
Q. 그래도 사회관계는 필요하다?
노년에는 관심과 위로, 격려를 받고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가족보다는 친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노년기에는 점점 친구 수는 줄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도 줄어든다. 그래서 친구와 이웃 노인이 중복되는 예가 많다. 그런데 요즘은 SNS로 세대를 넘나드는 친구 사이도 가능하다. 가까운 친구 열 명 중 세 명 이상이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 그 사람은 노후에 친구 문제로 고민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있다.
이 시기는 더 좋은 사회관계를 맺고, 더 좋은 모습으로 터닝할 절호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퇴직 후 85세까지 산다고 하면, 그 기간이 20~25년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되는 시간이다. 사회 관계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작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이야기를 하자면, 퇴직 후 처음에는 “책하고 돋보기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곧 무료해 하셨다. 그래서 복지관을 소개했는데, 그렇게 아버지는 늦깎이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자 삶에 활기도 생겼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집 앞에 화단이라도 가꿔야 한다. 화단이 없으면 화분이라도.” 아버지가 가꾼 우리 아파트 단지 화단에는 올봄에도 꽃이 활짝 피었다. 얼마전 그 화단을 본 누군가 ‘꽃을 가꾸던 할아버지’를 찾더라
- 글
- 유경(사회복지사·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 CBS 아나운서로 노인 대상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하다 노인 복지에 뜻을 세우고 사회복지사가 됐다. 노년과 중년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 강사, 죽음준비교육 전문 강사이자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이며, ‘유경의 죽음준비, 마흔과 일흔이 함께 쓰는 인생노트(공저), 마흔에서 아흔까지, 나이듦수업(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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